화창한 봄날이면 다정했던 할머니의 미소가 그립습니다.
1975년 3월의 일입니다.
경기도에 계셨던 부모님과 떨어져 강릉으로 향하던 버스안에 몸을 실어야 했습니다.
차창밖을 바라보며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생이 부모의 품안에서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시한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어린나이에 어쩔 수 없이 전학을 가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당시 고향인 강릉에 놀러가셨던 할머니께서 갑자기 소식이 끊겨 집안이 발칵 뒤짚힌 일이 있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한달만에 연락이 된 할머니께서는 “예전 거주지 인근에 집을 구입해 살고 있으니 걱정 말라”며 돌아오실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심을 거듭하던 부모님은 초등학생인 저를 할머니 곁으로 보냈습니다.
홀로 계신 할머니를 걱정해 사랑하는 아들과의 이별을 택하신 것이지요.
전학초기 좌충우돌 하던 저에게 할머니는 언제나 큰 버팀목이었습니다.
기죽지 말라고 용돈도 넉넉히 주시고, 도시락 반찬도 아이들 식성에 맞춰 챙기느라 고생하셨지요.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모자사생대회’ 참여여부를 놓고 고민하던 저에게 할머니께선 선뜻 손을 내미셨습니다.
“할머니가 조금 늙긴 했지만 다른 엄마들에게 뒤지지 않게 최선을 다해볼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강릉 경포대에서 모자사생대회가 열린 날은 참 화창했습니다.
봄볕이 따갑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크레파스를 골라주며 땀을 흘리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선 합니다.
한복차림의 쪽머리에 비녀를 꽂은 할머니는 참 고운분이셨습니다.
옛 속담에 “봄볕에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에 딸 내보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봄볕이 따가웠을텐데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앉아 손자가 그림을 그리던 모습을 살피시던 할머니는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40대 아들에게 회초리를 드실 정도로 엄했던 할머니는 손자에겐 더 없이 자상하셨습니다.
부모 곁을 떠난 어린 손자에게 할머니는 그렇게 또다른 어머니가 되 주셨습니다.
제게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 올리게 하는 시간여행의 매개체는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할미꽃 입니다.
할머니의 묘지 옆 양지바른 곳엔 다년생 초본인 할미꽃이 자주 피었습니다.
할미꽃은 언제 봐도 정겹고, 푸근함을 느끼게 해줬습니다.
할미꽃 이란 이름은 흰 털로 덮인 열매의 덩어리가 할머니의 하얀 머리카락같이 보인다는 이유로 붙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 많은 하얀 솜털의 수 만큼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저도 그러니까요.
강원도 정선엔 아주 특별한 할미꽃이 있습니다.
동강할미꽃<정선군 제공>
세계에서 하나뿐인 한국 특산종인 ‘동강할미꽃’ 입니다.
이 꽃은 정선군의 군화(郡花)이기도 합니다.
정선군 정선읍 귤암리 동강 변 석회암 뼝대(절벽) 주변엔 매년 3월 말부터 4월 중순 사이 사진작가와 많은 탐방객들이 몰려듭니다.
동강할미꽃의 화려한 자태를 감상하기 위해서죠.
이 꽃은 1990년대에 사진작가인 김정명씨에 의해 처음으로 촬영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식물학박사 고(故)이영노 박사에 의해 ‘동강할미꽃’이란 학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세계 유일종 식물로 인증을 받은 이 꽃은 보라, 백색, 적색 등 다양한 색상을 띄고 있습니다.
동강할미꽃<정선군 제공>
동강할미꽃은 주로 정선, 평창, 영월지역의 동강변에 자생하고 있습니다.
한때 일부 관광객들이 동강할미꽃을 훼손해 멸종위기에 처한 일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정선군 귤암리 마을주민이 2007년부터 ‘동강할미꽃보존연구회’를 결성해 보존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매년 3~4월 2인 1조의 순찰조까지 편성해 계도할동까지 벌인다고 하니 주민들의 열의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동강할미꽃<정선군 제공>
정선군도 동강할미꽃 묘포장을 확대운영 하는 등 보호증식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4월 정선군 귤암리 일대에선 '동강할미꽃 축제’가 열립니다.
동강 변 걷기, 사진전시회, 군락지 관람 등이 주요 프로그램입니다.
걷기행사 참가자들에게 동강할미꽃 씨앗과 모종도 나눠 주니 자생하는 꽃엔 절대 손을 대면 안되겠죠.
동강변 절벽위에 핀 동강할미꽃<정선군 제공>
4월이 가기전 동강을 찾아 절벽위에 핀 ‘동강할미꽃’을 감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산골 강변에 핀 동강할미꽃이 40대 후반의 손자 가슴속에 살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 보다 더 아름답진 않겠지만 말이죠.
경향신문 최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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