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녀들의 스마트폰 중독을 우려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틈만 나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카톡에 열중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엄지족이란 말도 이젠 잊혀진지 오래 입니다.
 스마트폰 등장으로 목디스크와 정신 불안증세를 걱정해야 할 판이 됐으니 피처폰 시대가 그리워 지기도 합니다.
 며칠전 중학교 1학년생인 아들 녀석에게 내일이 엄마 생일이니 편지를 꼭 쓰라고 당부한 적이 있습니다.
 재치있는 문자를 잘 보내던 녀석이라 정이 듬뿍 담긴 편지를 쓸 것으로 기대 했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생일날 아침 식탁에서 아들이 불쑥 내민 편지엔 딱 두줄이 적혀 있었습니다.
 ‘엄마 생일 축하드려요. 매일 밥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내는 쓴 웃음을 지었지만, 전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야, 엄마가 그저 밥해주는 사람이냐. 편지 다시 써.”
 그날 저녁 고민을 거듭하던 아들은 딱 한줄 덧붙인 편지를 다시 내밀었습니다.
 ‘P·S 엄마 사랑해요.’
 사랑한다는데 어쩌겠습니까. 그냥 웃고 말았죠.

 

강릉시 경포해변에 설치된 추억의 느린우체통 앞에서 피서객들이 엽서를 쓰고 있다.<강릉시 제공>


 올 여름휴가 땐 아들과 함께 강릉 경포해변을 꼭 가보려고 합니다.
 해수욕을 즐기려는 것이 아닙니다.
 스마트폰에 빠져 있는 아들에게 ‘느림의 미학’을 깨닫게 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섭니다.
 최근 강릉시 경포해변 중앙통로엔 이색적인 우체통이 설치됐습니다.
 ‘추억의 느린 우체통’ 입니다.
 ‘추억의 느린 우체통’에 넣어진 우편 엽서나 편지는 1년 뒤에 수신자에게 배달된다고 합니다.
 배달 비용도 강릉시가 부담하기 때문에 피서객들은 우표를 붙이지 않고, 사연만 적어 우체통에 넣으면 됩니다.
 빨리 빨리를 외치는 시대에 기다림의 의미를 되새기며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라는 취지에서 이 우체통을 설치한 것입니다.
 강릉시는 7월 12일 경포해변 개장일에 맞춰 ‘추억의 느린 우체통’ 옆에 엽서 1만장을 비치해 놨습니다.
 과연 이 우체통이 피서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우려섞인 예상과 달리 반응은 폭발적이 었습니다.
 피서객들이 ‘추억의 느린 우체통’으로 몰려들면서 1만장의 엽서는 1주일도 안돼 모두 동이 났습니다.
 높이 2.5m 크기의 빨간 우체통 안에 금방 갖가지 사연들이 쌓여가자 강릉시는 무료로 제공하는 엽서를 추가로 제작해 비치하기로 했습니다.

 

 

강릉시 경포해변에 설치된 추억의 느린우체통.<강릉시 제공>


 ‘1년 뒤 무료 배달’이란 이색적인 운영체제가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타임캠슐과 같은 역할을 해 피서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입니다.
 연인들은 ‘사랑의 맹세’를, 부모는 자녀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내용의 글을 많이 쓸 것입니다.
 전 아들 녀석에게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약속’이란 주제의 편지를 써 ‘추억의 느린 우체통’에 넣도록 하려 합니다.
 엄마에게 전한 편지 내용처럼 단문에 그칠지 모르지만, ‘추억의 느린 우체통’ 주변에 몰려들어 사연을 적는 피서객들을 보고 뭔가 느끼길 바라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초스피드 시대에 하루라도 빨리 우편물을 배달해 줘도 모자랄 판에 무슨 느린 우체통 타량이냐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쁜 일상에 쫓겨 지내다가 어느 날 수취함에 일년 전 추억이 담긴 편지나 엽서를 발견하면 얼마나 기쁠까요.
 분명 스마트폰을 통해 전해지는 문자에서 느낄수 없는 색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슬로시티 인증을 받은 곳은 물론 전국 각 도시들이 앞다퉈 이같은 ‘느린 우체통’을 설치하는 이유도 아마 같을 겁니다.
 1년 뒤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추억을 떠올릴 수있다는 자체가 중요할 테니까요.

 

해발 1708m의 설악산 대청봉 인근에 설치된 ‘대청봉 우체통’.<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 제공>


 지난 5월에 해발 1708m의 설악산 대청봉 인근에 설치된 ‘대청봉 우체통’은 매주 1회씩 수집돼 전국 각지로 발송됩니다.
 이 우체통은 국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설치된 것입니다.
 설악산 대청봉을 찾는 등반객들은 이 우체통이 설치된 이후 현장에서 산행의 감동을 엽서에 담아 보내는 사례가 많다고 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들 녀석은 제 곁에서 스마트 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습니다.
 추억을 떠올리며 삶의 속도를 잠시나마 늦춰보고 싶은분들께 권합니다.
 단 한번이라도 ‘느린 우체통’ 앞에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편지나 엽서를 써 보시길….

   가끔은 작은 쉼표도 필요합니다. 

 

Posted by 경향 최승현